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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 도요지

조선 백자 도요지 사진
조선 전기에 백자를 구웠던 곳이다. 가마는 땅을 파고 흙으로 양벽을 쌓아올린 터널식 칸가마이며, 물레작업장과 백토저장시설, 온돌구조가 남아 있고 가마터 발굴과정에서 청화백자편 등 많은 도기조각이 출토되었다. 조선백자 도요지는 조선 전기(15세기말 ~ 16세기 전반) 지방백자 요지로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백자제조를 위한 가마터이다.

도요지는 2개의 작업장으로 이루어졌으며,처음에는 산구릉의 자연경사를 따라 구릉 중턱에서부터 산위쪽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후 자리를 옮겨 앞의 가마와 거의 직각이 되게 서남쪽의 구릉 아래에서부터 구릉쪽으로 축조되었다. 가마는 지표면을 약 30∼40㎝ 정도 파서 반지하식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모래를 깔고 개떡을 놓아 수평을 잡았으며, 진흙으로 양벽을 쌓아 올려 구축한 터널식 칸가마이다.

작업장 역시 2곳이 발견되었다. 작업장 바닥에는 백토(白土)가 깔려 있었고 물레작업장과 백토저장시설 그리고 백토건조시설인 온돌구조가 남아 있었다. 이 가마터의 발굴과정에서 많은 도기편(陶器片)이 수습되었는데, 대부분 백자류인 발(鉢)과 접시류들이었고 이외에 청화백자편, 철화백자편, 청자, 분청자, 토기류 등이 극소수 출토되었다. 이 가마터는 대개 16세기 전반에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난종 선생묘 및 신도비 외 묘역일원

정난종 선생묘 및 신도비 외 묘역일원 사진
조선 세조 때 명신인 정난종 선생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가 아래로부터 산등성 중턱까지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각각의 묘에 대한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 석등, 동자석, 문인석 등이 갖추어져 있고 정난종과 차자 광필의 신도비와, 장자 광보의 묘갈명이 있어 고고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묘역 일원은 경기지방에 현존하고 있는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묘역중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정난종(1433~1489)선생의 자는 국형, 호는 허백당, 본관은 동래이다. 일찌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세조 13년(1467) 황해도 관찰사로서 재직하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성종 1년(1470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순성좌리공신 4등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관작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우잠찬,이조,공조,호조의 판서등을 역임했고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 최고의 서예가로 일컬어 졌다. 초서,예서를 잘쓰고 특히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경기도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과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서울 덕수궁의 [흥천사종명(興天寺鍾銘)]등의 그의 글씨이다.

묘역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남곤이 지었고,글씨는 둥지중추부사 강징이 쓴 것이다. 한편,차자 정광필(1462~1538)선생의 자는 사훈, 호는 수천으로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때 영의정으로 조광조 등을 구하려다 파직 되었으나, 퇴계 이황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문익이며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좌찬성 양곡 소세양이 지었고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전주이씨 안양군묘

전주이씨 안양군묘 사진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며 성종의 삼남인 안양군 이행은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출에 어머니 귀인 정씨가 관여되었다는 이유로 어머니, 동생 봉안군과 함께 사사된 인물이다. 묘역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표와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과 신도비 등의 석조물이 세워져 있으며 규모는 약 300여평으로 연지, 사당 등을 포함하고 있다.
후에 이 묘역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통정대부 거창 신중묵이 지은 것을 1976년 이형이 쓰고, 김충현이 전액을 하여 건립하였다. 안양군 묘는 1990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김만기 선생묘 및 신도비

김만기 선생묘 및 신도비 사진
김만기 선생은「구운몽」의 저자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형이며 숙종의 장인이다. 김만기 묘역과 신도비는 지금의 군포시 대야미동 산1-12전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앞 왼쪽에는 묘표가 있고 오른쪽 앞에는 숙종 어필의 묘표가 있다. 중앙의 대형분묘는 8개의 호석에 둘러싸여 있고 앞쪽으로 묘표와 8각의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조성되어 있다.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묘표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차자인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이고, 숙종 어필의 묘표는 숙종 25년(1699)에 세웠다. 신도비는 묘표와 마찬가지로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으로, 4각의 기단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첨석을 얹어 만들었다. 김만기 묘역과 신도비는 1992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이기조 선생묘

이기조 선생묘 사진
조선 인조때 문신인 이기조 선생의 묘는 원래 경기도 장단에 있었다가 1672년에 산본으로 이장하였으나 다시 산본신도시가 개발 되면서 1992년 현재의 이곳에 이장하여 부인 신씨와 합장하였다.
묘역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묘비는 1930년 을축 대홍수때 유실된것으로 알려져있고, 신도비는 좌의정을 지낸 현석 박세채가 짓고 손자 이명필이 썼으며, 외손 신완이 전액하였다.
이 유적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방짜유기

방짜유기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10대 3의 비율로 배합하여 만든 놋쇠이다.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김문익 선생은 이곳에서 전통적인 방짜유기 기술로 주발, 쟁반, 화로, 촛대, 향로, 꽹과리, 징 등을 만들고 있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사용된 바라는 바로 김문익 선생의 작품이다. 방짜유기란 유기합금의 일종으로 구리와 주석을 10대 3의 비율로 배합하여 만든 놋쇠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방짜유기가 제작된 것은 신라시대부터라고 하는데, 현재 유기제작 기술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주물제작법으로 쇳물을 녹여 그릇의 형태에 부어서 만드는 방법이다. 이 주물유기 제작법은 제작이 용일하고 합금도 자유로이 할 수 있다. 둘째는 우리말로 궁구름옥성기라 하는데, 이러한 제작법을 요즘은 반방자 유기라 부른다. 이 제작법은 절반을 주물제작법으로 만들어 놓고 불에 달구어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셋째는 구리와 주석을 75%대 25% 비율로 합금하여 처음부터 주물된 놋쇠 덩어리를 자주 불에 달구어 두들기면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이 세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여 만들었으나 안성의 주물유기, 납청의 방짜유기 순천의 반방짜유기 기술이 남아있어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재 남한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된 이봉주(李鳳周)가 납청유기 기술을 이식시켜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에서 방짜유기를 만들고 있다. 이봉주의 작품은 섬세하고 다듬어진 모양보다는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은은한 한국적인 미를 간직한 것이 특징이다.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동래정씨 동래부원군 종가는 갈치호수 지나 우측에 있는 속달마을에 있다. 수리산 줄기가 이어지는 곳, 서쪽편 마을 중심부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광보(鄭光輔,1457~1524)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그는 파시조(派始祖)인 동래군(東來君)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의 큰아들로서 이 가옥의 맞은편 산 중턱에 정난종의 묘를 돌보기 위해 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1877년에 지어졌으며, 안채는 178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행랑채 등 4동이나 원래는 사랑마당 바깥쪽으로 행랑과 연못, 작은 사랑채 뒤에 초당, 안채뒤에 사당, 오양간 등이 있었다. 초당과 오양간은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사당은 60년대에 훼철되었으며, 방앗간이 있던 바깥행랑채는 70년대에 무너진 것으로 전한다.

사랑채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큰사랑채는 전면 5칸으로 구성된 전후툇집으로, 누마루, 마루복도, 행사청 등 평면 구성과 칸의 구성이 독특하여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후기 살림집의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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